[이흥용] 제헌절에 국민주권을 생각하다. 국내정치경제사회2010/07/20 04:27
KPI 칼럼
제헌절에 국민주권을 생각하다
이흥용 (KPI 연구위원, 건국대 교수)
국민주권이란 무엇인가?
2010년 7월 17일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 공포된지 62주년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국민주권의 원리는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한국전쟁,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의 근대화와 경제적 압축 성장, 민주화를 위한 국민저항 등 해방 이후 파란만장한 헌정사를 거쳐 오면서도 불변의 헌법적 기본이념으로 국민주권의 원리는 확고하게 이어져왔다. 현행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하여 국민주권의 원리를 명확히 하고 있다.
국민주권이란 국민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모든 국가권력의 정당성의 근거이며 최고의 배타적 이고 자율적인 권위와 권력의 주체임을 의미한다. 주권이란 라틴어 supuranus에서 기원하는 단어로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과 권위, 즉 최고성과 절대성 및 자율성을 설명하는 신학적 개념이었다. 이 용어는 16-17세기 유럽에서 군주의 절대권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다가 18세기에 이르러 J.J.Reousseau의 국민주권사상으로 정립되었다.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국민주권사상은 근대입헌주의 헌법질서의 기본원리가 된 이후 오늘날 자유민주국가의 확고한 기본원칙이다.
일제로 부터의 해방 직후 국민주권의 원리는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선언적이고 규범적 관점에서는 명목적인 성격이 강했다. 서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원리로 확립된 국민주권 원칙이 한국 국민이 경험적으로 쟁취한 정치 원리가 아니라 수입된 개념이었기 때문이었다. 국민이 주권자로서 주인의 권리, 즉 인권이 존중되고 보장되며 국가권력이 국민에 의해 형성되고 비판받으며 교체되는 실제적인 주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까지는 오랜 노력과 민주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우리나라 국민은 성숙한 주권자인가?
1948년 헌법이 국민주권을 규정하기 전까지 국가의 주인은 조선 시대의 국왕 또는 일제시대 외부 지배자였다. 국민은 한낱 통치의 인적 대상이요 국가권력의 객체에 불과하였다.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왕이나 식민 통치자에게 굴복하고 어진 정치만을 기대하며 따를 수밖에 없는 피동적인 피지배자에 불과하였다. 정권담당자를 비판하거나 저항 ․ 교체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가 아니라 반역이었다.
주인으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던 국민이 헌법제정과 더불어 드디어 대한민국의 주인으로 선포되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국민이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건국 초기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정권이 퇴장할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주권자인 국민은 주인으로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권위주의 정권이 명목상 주인인 국민 위에 군림하였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주인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는 측면과 더불어 국민 또한 주인답지 못하게 행동했던 점도 많다. 국민이 통치자들에 의해 동원의 대상이 되었고, 선전선동의 객체로 이용당하거나 지역감정 및 반공주의 선전에 사로잡혀 휘둘리는 경우가 많았다. 주인은 모름지기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인답게 행동하며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줄 알아야 주인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권익을 누릴 수 있는 법이다. 주인이 주인답지 못하거나 똑똑하지 못하면 종들이 상전 노릇하며 주인을 오히려 홀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지난 세월 권위주의 통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민주의식과 주권자 의식도 놀랄 만큼 향상되었다. 지난 6 ․ 2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투표의식은 대표적인 예이다. 특정 정당의 지역정서에 기댄 패권과 몰표현상이 완화되었다. 무엇보다 천안함 사건을 다루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우회적이며 간접화법적인 선동이나 여론몰이가 주권자의 현명한 판단과 심판을 왜곡하거나 흔들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1987년 KAL 폭파 사건이나 그 후 총풍사건 뒤에 나타난 투표 쏠림현상이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천안함 사건의 후폭풍 속에서도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과 국가 정치작용의 품격을 생각해 볼 때 주권자 국민의 변화된 주인의식과 역량에 자위하고 만족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 한국 사회가 처한 현재 상황 뿐만 아니라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야할 미래상황을 염두에 둔 시대적 과제들을 생각해 볼 때 주권자 국민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에 대해 걱정과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이 분단된 채로 대립과 갈등의 질곡을 헤매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지역감정을 비롯한 계층 간 이념의 골은 깊어져 정치구도의 기본 구조로 고착되어 가는 점과 사회갈등의 과잉성과 사회의 정치화 현상 등으로 말미암아 공감대적 가치지향의 통합능력이 취약한 점 등을 생각할 때 남북한 사이에 오랫동안 자리잡은 불신과 이질성을 극복하며 동화적 통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걱정된다. 이러한 자기 분열적 상황 속에서 분단의 평화적인 관리능력과 연속변량적인 남북한의 통합능력, 나아가 미래 통일한국의 안정된 관리유지 및 발전능력은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국민들의 생각 가운데는 이율배반적인 묘한 이중성이 있어 보인다. 독재를 반대하고 저항하면서도 의견수렴의 절차를 무시하는 강력한 지도자를 바란다. 세월이 흐른 현시점에도 박정희 리더쉽에 은근한 갈채를 보내며 그리워하곤 한다. 과장된 경제위기론이나 선진화론 등에 현혹되어 정권운용의 독단과 밀어붙이기식 정책추진을 은근히 지지하며 독재의 효율성에 빠져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대화와 타협과 설득 보다는 신념과 확신의 지도자라며 독단의 리더쉽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다. 그 배면에는 인간사회 어디에나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그 다양성의 사장질서 가운데 공존과 타협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부족과 소통의 절차과정을 중요시 하지 않고 압축 성장기와 같이 조급히 추진․결정하는 성급함과 미성숙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정당 간 차이점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시각도 생각해 볼 문제다. 다양한 정당들이 서로 다른 이념과 정책을 갖고 서로 비판하고 대립하며 국민의 지지를 받기위해 경쟁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것임에도 국민 대다수는 이를 부정적으로 본다. 정당간의 정책 차이나 이념의 다름을 표현하고 비판하는 자세나 언어표현이 천박하거나 거칠어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등의 정치행태에는 비판하는 것이 옳지만, 서로 다른 이념과 정책을 갖고 국민의 지지를 더 많이 받기 위해 토론과 비판을 치열하게 하는 것에는 오히려 장려하고 견인하여야 할 일이다. 국민을 위해 타협하며 공통분모를 찾아내지 못하면서 비방만 일삼는 정치력 부재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정당이 다른 이념과 정책을 가지고 대립하며 경쟁하는 복수정당체제는 주인인 국민을 섬기기 위한 경쟁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국민주권의 확립을 다짐하자.
국가권력을 담당한 자들이 국민을 위해 일하도록 견인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바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국민이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내려 보며 수를 읽는 것이다. 권력자의 오만함을 경계하는 국민의 엄중한 판단이 국가권력 담당자가 하인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고 주인을 섬기도록 만든다. 주인이 매사 돌아가는 일거수 일투족을 손금보듯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못된 하인의 행위에 대하여 엄중히 꾸짖는데 하인이 주인을 속이거나 농락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한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주인의식 수준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이 주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국민주권의 기본이념을 국가생활 전반에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주인의식을 갖는다면 선거에 참여하여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국가공권력 담당자들, 즉 국민을 위해 일할 일꾼을 엄선해야 한다. 주권자인 국민이 수천, 수만의 복잡하고 전문적인 개별정책을 입안하고 심의해서 결정하여 집행할 수 없기 때문에 행정 ․ 입법 ․ 사법 등의 중요 국가기관의 구성원들을 선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정한 임기동안 주인인 국민을 위해 열심히 충성 봉사하도록 일을 맡기는 것이 현행 헌법의 정신이며 원리이다. 선거 때 한 약속을 당선된 후에 헌신짝 버리듯이 할 공직 후보자는 선거판에 얼씬하지 못하게 만들어야한다. 학연 ․ 지연 등을 불 지펴 표를 얻으려 하거나 돈으로 표를 매수하려드는 후보자들은 결국 주인인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되돌리는 자들이기에 제대로 된 주인이라면 이들을 엄하게 꾸짖을 줄 알아야한다. 국민이 주인으로서 잘못된 정책을 표로 심판하고 정치가들의 책임을 엄하게 묻고 따지는 모습을 보일 때 일꾼들은 주인을 무서워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게 될 것이다.
둘째,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의 정치적 기본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국정전반에 건전한 비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주인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꺼리는 소위 정치꾼들은 선거가 끝난 후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인 국민은 선거 때 투표권을 올바르게 행사하는 것 못지않게 평상시 권력자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국민을 위해 일하도록 견인하는 주인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가 미래형성적인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끊임없는 건설적 비판을 해야 한다. 입법부나 사법부를 비롯한 중요 국가기관과 지방자치권력까지 모든 권력기관은 투명하게 국민 앞에 감시되고 비판되어짐으로서 국민을 위한 투명한 공적 권력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 분야에서 전문성과 능동성을 갖춘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단체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고 활성화되어야 한다. 다양한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시민사회의 성숙과 공존이 공감대적 가치질서인 헌법체계 안에서 활성화 될 때 그 사회는 안정되고 관용적이며 되며 공공성도 확립될 수 있다.
셋째, 정당 정치가 확립될 수 있도록 건설적 비판과 참여가 필요하다. 복수정당의 존재의미는 국민을 위해 서로 다른 정책을 놓고 상호 비판하고 경쟁하는데 있다. 국민은 정당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치밀하게 잘 짜여진 정책을 책임감 있게 제시하며 품위 있는 정책대결을 해나갈 수 있게 견인해야 한다. 정당간의 비판과 경쟁과정을 통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위하는 정책, 국민이 원하는 정책을 내세우고 수행할 수 있는 정당에게 주권자인 국민이 일정 기간 국가권력을 맞기는 것이 바로 대의민주정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야당은 건설적 비판적 기능에 철저해야 한다. 야당의 존재 이유가 대안있는 비판을 통해 국민의 신임을 얻어 정권을 획득하는 데 있고 이러한 정권의 교체가능성이 담보됨으로써 권력의 견제균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헌절에 국민 모두가 국가생활의 기본원리인 국민주권을 깊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에 충실한 강력하고도 성숙한 민주국가로 발전해 가야한다. 제 62회 제헌절을 보내면서 헌법제정권자인 국민이 주권자로서 참 주인으로서 대접받고 또 그렇게 대접받으려면 어떻게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것인지 깊이 성찰하며 다짐하는 우리 모든 국민이 되길 바래본다.
(KPI칼럼 게재일: 2010.07.20)
